자(字)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陽川)이다.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내신 허론이며, 조부는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허곤이다.
허준선생은 30대 초반에 내의원에 들어가 37세에 어의로서 국왕의 병을 직접 진료하며, 내의원 의관을 총괄하는 수의로서 활약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1610년(광해2)에 완성하고 1613년(광해5)에 초판을 간행한 의학서적으로 25권 25책으로 발행되었으며,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허준선생께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동의보감 집례(東醫寶鑑 集禮)’에 나와 있듯이 “옛적에 이동원이 「동원십서(東洹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로서 관중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은 동방에 치우쳐 있지만 의약의 도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의학도 가히 동의(東醫)라고 할만하다.”고 하여 우리나라 전통의학과 동의보감을 중국 의학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이동원, 주단계와 견주고자 했던 것이다.
2009년 7월 30일 바베이도스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에서 공중보건서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전문의학서로 인정을 받았고, 우리의 전통의약인 한의약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한의약의 우수성과 가치를 전국민과 더불어 지구촌 인류에게 홍보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지난 2013.9.6 ~ 10.20(45일간)에 이곳 동의보감촌에서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하였다.
자(字)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숙종의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이때 공로로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가인 산음(현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유이태(劉以泰) 선생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이자, 산청을 대표하는 의학 인물이자 영남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경남 산청군 생초면 출신이다.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유이태 선생은 죽었던 사람을 살렸던 신의(神醫), 환자가 의원을 따르게 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는 심의(心醫)로 불려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으로서 영남을 대표하는 조선의 선비 의사로서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라는 책에 수록된 영남인 56인의 1인이고, 영호남을 대표하는 조선의 의원이며, <조선의 명의들>이라는 책에 조선의 8인의 명의(名醫)의 1인으로 수록된 의원으로 조선의 의학 사상가이며. 경상도 산음의 빈민 구제가(救濟家)이다.
1652년에 태어난 유이태 선생은 어린 시절에 자신이 앓고 있던 고질병을 혼자서 의서를 읽고 고친 후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였다. 사람은 평등하므로 조선의 백성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에 입문하였다. 3년 만에 의술이 통달하여 의원이 된 후 산음과 인근 고을, 그리고 영호남의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30세에 명의(名醫)의 명성을 얻어 이름이 궁궐과 조선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승정원일기에 유이태 선생은 영호남을 대표하는 명의로 기록되어 있다.
유이태 선생은 1710년과 1713년 임금 숙종의 환후가 발생하자 나라로부터 두 번의 부름을 받았다. 어의가 된 유이태 선생은 임금의 병을 고친 공로로 숭록대부 품계를 받았고, 경기도 안산 군수에 제수되었다.
1600년 초반 조선에 처음으로 발생한 홍역은 치료법이 없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1668년, 1680년, 1692년 조선 전국에 홍역이 창궐하자 유이태 선생은 홍역 치료에 나섰고, 전염병 홍역 치료 태두로서 홍역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인 최초로 홍역 치료 전문 의서 <마진편>을 남겼다. 향의로서 40년간 환자를 치료하면서 기록한 경험방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1975년 드라마 <집념> 방영 때 대학교수라는 분이 가져간 <의서 2권>, 1940년대 종손 집 사랑채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 <부인방> 등 7권의 의서를 저술했고, 유품으로 <유이태유고>, <예조정장>, <정영장>과 <간찰>을 남겼다.
유이태 선생은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가진 재산을 나누어 주는 시도(施道), 바른길을 걷는 정도(正道), 재물을 탐하지 않고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는 의도(醫道), 건강하게 장수하는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했다.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질병 없는 세상을 열고자 일생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貴賤)과 친소(親疏), 빈부(貧富)와 민관(民官)을 차별하지 않고 환자(患者)만을 치료했다. 유이태 선생은 유학자 의원으로 조선의 유의(儒醫) 전범(典範)을 제시했고, 질병 예방을 주창했으며, 경험 치료를 중시하였고, 의학의 발달과 윤리 도덕을 확립했다.
유이태 선생의 의학사상을 인생관, 정신관, 수기관, 학문관, 치병관, 의약관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인생관은 ‘사친지의(事親知醫), 제중인심(濟衆仁心)’으로 어버이를 공경하기 위해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자손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신관은 ‘무귀무천(無貴無賤), 무친무소(無親無踈)’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과 친소, 빈부와 민관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을 보살피며 사랑하는 위민(爲民)·애민(愛民) 정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수기관은 ‘존양천리(存養践履), 성실불구(誠實不苟)’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학문관은 ‘공리후세(功利後世), 보상일신(補償日新)’으로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넘기고 후학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치병관은 ‘미병절선(未病節宣), 선조후치(先調後治)’로 건강할 때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완치 후에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약관은 ‘향정비약(鄕井備藥), 단방수록(單方隨錄)’로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채록하고, 치료한 경험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전통적인 향약 의학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생전과 사후의 백성들, 그리고 유이태 선생으로부터 병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 화타와 편작, 현대에 와서는 의학의 발달과 윤리 도덕을 실천한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에 비유되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 채록된 유이태 설화는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고, 명의 설화의 백미 설화인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산청의 명의인 초객(楚客은 자)·초삼(楚三은 자)형제는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 출생으로 본관은 양천이다.
형인 초객의 호는 문포(文圃), 본명은 허영(許郢)이고, 아우인 초삼의 호는 호은(湖隱), 본명은 허언(許鄢)이다.
초객은 약처방에 능하였고 초삼은 침술로 이름을 떨쳐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생 초삼이 침으로 응급치료를 하면 형인 초객이 약을 써서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 진양의 향토사를 기록한 「진양지(晉陽志)」에 이들의 명성을 전해주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초객이 금강산 방면을 돌다가 어느 마을의 머무르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마침 약을 달이고 있었다. 약봉지에 ‘초객탕’이라고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기에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주인의 아이가 두창(頭瘡)으로 사경을 헤매는데, 의이 이르기를 나을 약이 없다고 했다. 영남에 당대의 화타, 편작이라 불리는 허초객이란 명의가 있어 환자들이 흔히 그 이름을 약포에 적어 복용하면 혹여 살아날 수도 있다하기에 시험 삼어 해 본 것이라 하였다. 초객이 웃어 말하기응 이름만 빌려 쓴 약을 주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을 찾아가 처방을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고 약처방을 알려주니 얼마 있다가 환자가 낫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초객·초삼형제의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청을 근거로 활약하면서 초객이 저술한 경험의약자료인 「진양신방(晉陽神方)」은 한국한의학연구원에, 「진우신방(晉隅神方)」은 산청한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 지방의학 발전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산청지역의 소중한 의약문화유산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이다.
초객선생의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에, 초삼선생의 묘소는 산청군 단성면에 있다.
김수로왕의 10대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며 서기521년에 등극하여 532년까지 11년동안 재위하였다.
위는 구형(仇衡), 시호는 양(讓)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편에 의하면,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신라가 가락국이 병합되었따. 구형왕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을 중단하고 나라를 양위하였다하여 양왕(讓王)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구형왕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4~5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라를 지키지 못함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한 유언에 따라 손자 김서현(金舒玄)이 석릉을 조성했다.
이곳에서 김유신장군은 7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시조(김수로)명료를 왕산중턱의 왕대에 추봉하고 왕산사는 구형왕과 선대왕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는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이곳에서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기상을 닦았고, 사대터, 시능터 등 왕산 일대 유적지를 남기게 됨으로써,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삼왕(김수로왕, 구형황, 흥무대왕 김유신)의 고적지가 되었다.
가락각의 옛터 왕산사지(태왕궁지)는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어있다.
국가 사적 제214호 구형황릉(仇衡王)은 경사진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역사 사적지이다.
이곳이 왕릉이란 사실은 1798년 산청유생 민경원에 의해 왕산사의 나무궤어 보관되어온 탄영스님의 「왕산사기」와 구형왕, 계화왕후의 영정, 의복, 녹슨 칼, 활, 유품 등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후 후손들이 왕과 왕후의 향화를 받들어 지금까지 220여년 동안 제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 있다.
왕릉 아래로 1Km 지점에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제례를 받는 전각인 덕양전(德讓)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매년 봄(음력3우러16일), 가을(음력9월16일)에 춘추제례를 올리고, 매월 초하룻날 보름날에 삭망 항례를 올린다.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강성현(江城縣,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에서 남평문씨 충정공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익점은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이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첫째 나라가 융성하지 못함을 걱정하며, 둘째 성리학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셋째는 자신이 학문을 통해 도를 이루지 못한 세가지 근심걱정을 뜻한다.
효행에 있어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그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 왜군이 남해안 일대를 침입하는 상황에서도 상복을 입고 묘를 지키며 3년상을 지냈다. 왜장이 이를 보고 감탄하여 나무를 켜서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말라)’는 글자를 써 놓고 가니, 그 고을ᄁᆞ지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휘사(指揮使)로 삼남지방에 내려온 이성계는 선생이 지키는 묘로 조문(弔文)을하고, 3년강을 지킨 문익점의 효를 표창할 것을 우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1383(우왕9),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부르고 삼우당효자비를 세웠다.
33세에 고려의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계획에 동조하라는 원나라 황제의 강압적인 조용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 두 군주가 없다.”는 말로 거절하며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이에 원라라 황제의 미움을 받아 운남서 교지국에서 귀양살이를 살다가 그곳에서 헐벗은 백성을 떠올리며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종자를 붓대롱에 넣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종자를 심어 기적적으로 목화재배를 성공하게 되고 순신간에 전국에 보급되어 농가 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문화에 크게 향상시켰다. 훗날 세종대왕이 문익점에게 “부민후(部民候)”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목화시배지’는 사적 108호 지정되어 있으며, 단성면 사월리 106번지에 있다.
휘(諱)는 식(植), 자(字)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溟),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조식은 합천군 삼가면에서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아버지 조언형(曹彦亨),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 태어났다. 5세때 아버지가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 장의동으로 이사하였으며,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고충을 직접 누여겨 보게 되었다.
48세 때 고향인 합천 삼가로 돌아와 계부당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처사로서 왕권에 대항해 잘못된 국정을 비판하였다.
이 때 오건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하항·옥계·김우옹·최영경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륜동(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으로 옮겨 살면서 산천재(山天齎)를 지어 죽을 때 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산천(山天)’은 「주역(周易)」대축괘(大蓄卦)의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서, 군자가 이를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 빛냄으로써 날로 자신의 덕(德)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조식선생의 학문은 경(敬)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의(義)로서 과감히 실천하는 수양과 실천사상을 강조하였다. 경(敬)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 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을 하는 것은 의이다.)를 새긴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녔다.
72세 때 산천재에서 선생의 부고가 알려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대사간(大司)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유림들과 제자들은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德川書院, 현 산청군 시천면 원리)을 세웠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4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5세 때인 1936년 3월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47년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운봉 스님으로 비롯된 봉암사 결사는 수행하면서 지켜야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내걸어 한국불교의 전통을 바로잡고, 전통에 따른 참선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한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44세 때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외부의 출입을 막으며 독버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를 확립하였다.
1967년에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면서 그 해 겨울 음력 11월 3일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음력 1월 20일까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대중들에게 매일 「백일법문(白日法問)」을 열어 불교의 근본진리가 ‘중도(中道)’에 있음을 말하며 선종의 종지가 ‘돈오돈수(頓悟頓, 한번의 깨달음으로 수행이 완성)’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81년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할 때에 취임법회에는 나가지 않고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로 등장하면서 최초의 한글법어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함녀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종단의 안정을 가져왔다.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셨다.(세수 82세, 법랍58세)
20012년 셩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있는 생가터에 성철스님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겁외사(劫外寺)가 들어섰고, 사찰 뒤로 성철 스님의 생가인 율은고거와 사랑채 건물, 성철스님 기념관이 있다.
호는 기산(岐),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산청군 단성면 길리에서 박성호의 차남으로 태어나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여 15세까지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16세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 6개월 만에 보통과(초등학교)를 마치고 1923년 중등중학교(中等中學校) 고등과 3부를 졸업한 후 형님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1928년 지리산에서 4년 동안 가야금과 한시 연구에 몰두했다. 이후 진주로 돌아와 ‘준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고, 상경(上京)해서는 정악, 아악풍류, 경서도 가무 등 국악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조선음악협회 조선악부에서 민족음악진흥을 꾀하다가 광복이 되자 ‘국악건설본부’를 창설하여 국립국악원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국악(國樂)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1960년 민속악 교욱을 위한 최초의 사립국악교유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국립극장 운영위원, 한국 국악협회이사장, 줌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 「창악대강(唱樂大綱)」을 통해 국악에 대한 열정과 혼을 후세에 남겼으며, 평생을 국악진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산청군 단성면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산관, 교육관, 전시관을 건립하여 기산국악당이라 이름 지었다.
선생은 생애 전반기에는 국악의 부흥과 계몽에 힘썼고, 중·하반기에는 국악의 이론가 및 교육가로 국악진흥에 헌신하였다. 국악운동의 선각자이며 구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국악교육 계승발전에 큰 틀을 세운 국악계의 스승이시다.